출판, 디자인, 인쇄, 유통, 영상, 예술 관련 업체가 한곳에 모여 책과 문화를 만들고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의 아이디어가 모이는 곳, 바로 파주의 ‘출판도시’이다. 파주출판도시의 설립 과정과 이곳만의 매력을 살펴보면 우리 도시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앞으로의 도시재생이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안겨줄 것이다.
세계적으로도 첫 사례로 평가받는 ‘출판문화도시’의 조성 과정
파주출판도시는 1988년, 책을 만드는 데 뜻을 둔 여덟 명의 출판인들이 모여 책을 만들기 위한 전 과정(출판 기획, 편집, 인쇄, 물류, 유통)을 집적화함으로써 출판업계의 고질적 문제였던 불합리한 유통 구조를 효율적으로 바꾸고 출판 산업에 시너지 효과를 내기 위한 도시를 만들자고 다짐한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뒤 약 874,000㎡(260,000평)의 황량한 습지이자 군사 작전 지역이었던 곳에 공사를 진행하여 2007년 1단계 공사가 완성되었고, 책과 영화의 도시 건설을 목표로 2007년부터 시작한 2단계 공사가 2012년 말에 완성됐다. 그렇게 17년 뒤 파주출판도시는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산업 단지’보다는 ‘출판도시’라는 이름이 더 어울리는 이곳은 국가 산업 단지로 분류되어 있다. 출판 산업과 도시의 미래를 내다보았을 때 국가의 정책적 지원을 이끌어내는 것이 중요하기에 설립자들이 국가 산업 단지로 지정받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다. 이는 지금의 파주출판도시의 모습이 있게 하는 데 큰 보탬이 되었다. 현재는 124개의 출판 및 예술 기업이 이곳에 입주하여 파주는 본격적인 ‘문화 예술 도시’로 도약하였다.
어디에도 없는 도시, 파주출판도시만의 문화·예술·건축·생태적 가치
출판도시의 가치는 출판 산업에 기여했다는 점에 그치지 않는다. 출판도시의 도시 전체 건축을 디자인하기 위해 코디네이터 승효상·김영준 건축가 등은 특별한 건축 지침을 만들었다. 바로 땅의 조건과 건물의 용도를 유형으로 분류해 건물의 생김새를 정하고, 알루미늄판·화강석·타일·붉은 벽돌 등의 사용을 금지하여 출판도시만의 색깔을 유지하고자 했다. 이들이 맺은 ‘계약’에 따라 독특한 건축물이 하나둘 들어섰다. 출판도시의 입주사와 건축가들이 맺은 이 약속은 책을 위한 유토피아이자 건축가들의 아키토피아인, 새로운 문화 허브를 탄생시킨 ‘위대한 계약’이 되었다.
그들이 만든 도시의 진정한 가치는 따로 있다. 수익성 창출이나 효율성을 따지며 콘크리트로 채워진 도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습지와 자연적 지형을 배려하면서 공간을 조성하여 도시의 분위기를 바꾼 것이다. 이는 ‘채움’에 급급한 이 땅의 건축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중요한 해답을 제시했다. 그리고 이곳은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이 합류하는 샛강으로 이름난 철새 도래지이자, 갈대 군락이 자생하는 어디에도 없는 ‘생태 도시’가 되었다.
<2017 경기도건축문화상 사용 승인 부문 동상 수상,>, 출처: 영화사 집(ZIP)의 새 보금자리, 파주 사옥,
<이곳에는 매년 철새가 온다>, 출처: 이슈 파주 이야기, 출판도시의 탄생 비밀
출판도시에 자리를 잡은 것은 출판 산업만이 아니다. 영화 제작사를 비롯한 영상 관련 업체들이 입주하게 되면서 이곳은 종합 문화 예술 도시로 도약했다.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모이니 도시에는 언제나 영감과 이야기가 넘쳤고, 새로운 분야에 대한 흥미와 배움이 솟아났다. 파주출판도시가 연 문화도시의 새로운 패러다임은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의 ‘제6회 셰이크 자 이예드 도서상’에서 문화 기술 부문 최고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으로도 그 공로를 인정받았다.
파주출판도시를 즐기다
이처럼 파주출판도시가 알려지면서 많은 여행객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파주출판도시에서는 이들을 위해 다양한 견학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교육 및 체험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활판 인쇄로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경험할 수 있으며, 생태 환경에 관련된 책을 읽고 생태 환경이 우수한 야외에서 진행되는 생태 놀이와 탐방을 할 수 있는 생태 체험 학습, 인문 예술 서적을 관람할 수 있는 프로그램 등이 마련되어 있다. 더 나아가 출판도시만의 고유한 건축과 조경, 생태 환경 또한 ‘디자인 투어’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출판도시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위대한 계약: 파주, 책, 도시>
파주출판도시의 설립 배경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보아야 할 작품이 있다. 바로 다큐멘터리 <위대한 계약: 파주, 책, 도시>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파주출판도시의 설립 과정과 도시 속 생태적 측면, 문화적 측면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또한 과거부터 현재까지 출판인이 모이게 된 1단계, 영화·영상인이 모인 2단계, 그리고 예술가가 모여드는 3단계를 거쳐 도시가 진화하게 된 과정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다. 건축·공간 영상 제작 전문 스튜디오 ‘기린그림’의 정다운 감독과 김종신 피디가 기획하고 제작한 이 다큐멘터리는 ‘제46회 서울독립영화제’ 및 ‘제12회 서울 국제건축영화제’에 공식 초청되었고, ‘제12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예술공헌상’을 수상하며 그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파주출판도시를 보며
효율과 손익만을 따지지 않았던 그들의 ‘계약’. 그 계약은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던 파주의 늪지를 대한민국과 세계를 대표하는 건축가들의 특색 있는 건축물, 그리고 심학산과 한강의 낙조 경관과 어우러지게 했다. 그리고 파주를 세계에서 유일한, 책을 위한 생태 도시로 만들었다. 한국 사회도 산업화 시대 이후 빠른 성장을 위해 조성되었던 정형적이고 획일화된 도시에서 벗어나 보다 다양한 가치와 생태를 포용하는 도시로 발전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 우리 사회에는 ‘더 좋은 도시’를 꿈꾸는 문화가 자리 잡아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파주출판도시는 ‘공동성의 실천’을 위한 연대가 만들어낸 새로운 도시의 가치를 보여준다. 파주출판도시를 보며, 지금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의 의미와 가치를 다시금 돌아볼 필요가 있다.